🍅 [제철휴식] 지는 게임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휴식은 오늘이 제철, 제철휴식

2025. 9. 19.

뉴스레터 제철휴식

🥕 휴식은 오늘이 제철, 제철휴식

제철은 ‘알맞은 시절'을 의미해요. 휴식에도 제철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오늘, 지금일 거예요. 오늘의 휴식을 내일로 미루면, 일상은 금방 상해버리니까요. 오늘의 작은 휴식의 틈을 놓치지 않도록, 매월 두 번 제철휴식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나에게 작은 휴식을 선물하고, 건강하고 싱싱한 일상을 만들어보세요.

연재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합니다.

제철휴식에서 '보드게임'을 주제로 한 글을 연재합니다.

저는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꽤 자주 합니다. 스크린에서 벗어나,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진지하고 답답한 생각에서 벗어나,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고 떠들 시간을 마련해 준 보드게임이라는 놀이의 세계에서 느끼고 배운점이 많기 때문이에요. 놀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더 깊게 충전하고 회복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얼마나 진한 개운함과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 싶어요.

원고의 일부는 이전에 미리 써 둔 것이고, 일부는 제철휴식을 통해 마감하면서 구독자분들께 가장 먼저 원고를 배송하고자 합니다. 원고가 어느 정도 묶이면 책의 형태로 만들어 보고 싶은데요. 만약 이 글들이 엮여 책이 된다면 한 권의 ‘보드게임 영업멘트’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좋은 걸 나만 누릴 수는 없어’라는 덕후의 정신을 담아 찐하게 영업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연재를 준비하며 다른 코너들은 잠정적으로 쉬어갑니다. 대신 이 연재가 여러분께 새로운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 독자가 되어주실 구독자분들의 응원과 의견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로웠던 점, 바라는 점, 더 듣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보내주세요.

지는 게임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 나는 아빠와 장기로 1:1 대국하는 것을 즐겼다. 말이 좋아서 대국이지, 아빠는 차포를 떼고 하거나 아슬아슬하게 지는 척을 하며 나에게 판을 내줬다. 이길 때마다 나는 기쁨의 세리모니를 했고, 돌이켜보면 그것은 경기라기보다 내 원맨쇼였다. 장기가 재밌다기보다 아빠와 노는 게, 그리고 어떻게 하든 결국 이기게 되는 가짜 승부가 즐거웠던 것이다.

늘어가는 세리모니력에 비해 ‘패배를 받아들이는 힘’, 즉 패배력은 약해져만 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교나 사회에는 차포를 떼줄 사람이 없었고, 승부가 명확한 게임이 시작되면 나는 경직됐다. ‘경쟁’, ‘승부’, ‘경기’ 같은 단어가 붙는 순간 몸이 얼어붙곤 했다. 그러니 단순 재미로 하는 게임마저도 내게는 패배가 드러날 위험성을 가진 행위에 불과했다.

그렇게 ‘게임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내 정체성 중 꽤 큰 부분이 되었다. 사실 나는 두려웠다. 질까봐. 더 정확히 말하면 지면 나도 모르는 어떤 표정이 나올까봐 두려웠다. 어쩔 줄 모르는 패배의 표정, 내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을 늘 경계했다.

결혼 후, 남편이 보드게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속으로 ‘같이 안 할 거야’라는 소심한 다짐을 했다. 게임에서 지고 난 후 어른스럽게 악수를 건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내적 저항 속에서 ‘아그리콜라’라는 보드게임을 처음으로 했던 날을 떠올린다. 자신만의 농장을 운영하며 농사일을 하고, 가축을 기르고, 식구들의 밥을 구해 먹이는 게임이다. 이겨야 한다는 전투 모드에 사로잡혔던 나는 신기하게도 그 게임을 하면서 무장해제가 되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꼈다.

다른 플레이어와 나를 비교할 틈 없이 내 플레이 자체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승부라기보다 나만의 호흡을 만드는 일에 가까웠다. 곡식을 먹으려면 → 밭을 갈아야 하고 → 씨를 뿌려야 하고 → 시간이 지나 수확을 해서 → 빵을 구워야 한다는 리듬에 몰입하다 보니 농장은 나만의 아름다움을 갖게 되었다.

게임을 하며 발견한 내 성향도 있다. 나아갈 길을 미리 그려보기를 좋아하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편이다. 지면 쉽게 감정이 드러난다. 그만큼 게임에 진심이고, 승부욕이 강하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수익을 올리는 경영 게임을 좋아하고, 자원 획득의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지 고민하는 것도 즐긴다.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직관과 무의식을 따르는 감각형이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게임하는 나’를 만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건 현실의 나다. 손해 보는 게 두려워 용기 내지 못했던 많은 순간들, 그러나 큰 결정 앞에서는 오히려 담대해지는 모습. 없는 것에서부터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고, 만들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그 환경과 시스템을 어떻게 유지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도미니언’이라는 덱빌딩 카드게임도 있다. 나만의 덱을 효율적으로 구축해 승점을 얻는 게임인데, 상대와의 인터랙션이 적어 아그리콜라처럼 내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이 길다.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원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걸 좋아하는 내 성향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과 기회 안에서 더 나은 수를 찾기 위해 골똘히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그 순간의 내가 꽤 멋있게 느껴졌다.

‘꼬치의 달인’을 하면서는 내 찌질함과도 직면했다. 주문이 들어온 꼬치를 재빨리 엮어야 하는 섬세한 피지컬 게임인데, 처음에는 놀라울 정도로 잘했다. (세리모니가 나올 뻔했다.) 친구들은 나를 ‘유달인’, ‘유가네 꼬치’라 불렀다. 그러다 어느 날 나보다 더 잘하는 친구를 만나고 몇 번 패하자, 나는 ‘절꼬’(꼬치의 달인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선언, ‘절필’에서 유래)를 외치며 그 게임을 내려놓았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깨끗하고 빛나는 면, 울퉁불퉁하고 서툰 면 모두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게임의 모든 순간이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런 구불구불한 내 모습을 함부로 들키고 싶지 않아 게임을 미뤄왔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으면서도 통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알았다. 상대가 내 플레이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오직 내 리듬에 집중하는 게임을 만났을 때, 안전하게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신중하게 한 수 한 수를 만들어가는 나를 보며 ‘지금 내가 게임에 완전히 올라타 있구나’라는 감각이 들 때, 그때부터 진짜 승부가 시작된다.

보드게임은 예상치 못한 나의 자아들을 툭툭 소환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재밌고 반갑기도 했다. ‘플레이어 유보라’는 보드게임을 할 때마다 크게 웃고, 친구들과의 순간을 아름답다 여긴다. 동시에 패배에 무척 약한 자신을 금세 들키고는 쑥스러워한다. 놀이가 아니었다면, 어릴 적의 순수하고 원초적인 감각을 다시 꺼내지 않았다면 몰랐을 나다.

이제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생겼다. 얼마나 즐겼는가, 얼마나 충실했는가, 얼마나 나다운 리듬을 지켰는가. 세상에는 너무 많은 필승법과 꿀팁이 돌아다녀 때로는 불편하다.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건, 끝끝내 승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여정 속에서 나를 만나는 일 아닐까.

지난 호 피드백을 모아 소개합니다.

한별님

처음 글을 남겨 봅니다. 보드게임이 연재된다는 기쁜 소식에 참을 수가 없어서요. 🎲대.환.영.🎲 회사 보드게임 동호회 일원입니다. 짝꿍과 여행가서도 보드게임을 할 만큼 좋아해요! 제철휴식에서 어떤 보드게임이 소개될지,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을지 기대되어요. 응원의 마음 가득 담아 보냅니다!
(ps. 저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입니다. 글들이 쌓인다면 저희 회사도 한번 두드려 주세요. 🍀)

↳ 보라의 답장: 보드게임 동호회 일원이시라니. 풀뿌리 보드게임 문화에 일조하고 계심에 기쁘고 반갑습니다. 앞으로 응원 기운 받아 재밌게 풀어볼게요! (편집자님...!)

궁금녀

동생이 왜 그렇게 게임을 좋아하나 했더니 글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었네요 ㅎㅎ

그런데 보드게임보다 pc게임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어필을 해야할까요

↳ 보라의 답장: 동생이 이해가 되셨다니.. 너무 뿌듯한걸요. 각기 다른 매력이 있지만 보드게임만의 매력 포인트를 앞으로 하나씩 연재해 보려고해요.

전초월

보드겜 소개라니 기대돼 죽겠네요~~ 어디있나요 다음편은~~ 목빠집니다요

↳ 보라의 답장: 다음편 여기 소중히 담아 보냅니다. 초월님 앞으로도 기대 많이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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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휴식 발행인

보라: 라이프컬러링을 운영하며 <내가 좋아하는 휴식리스트 만들기>, <휴식 박사과정>을 운영하는 자칭, 타칭 휴식 덕후. 사람들이 각자의 휴식을 발견하는 모습이 좋아서, 나만의 휴식법을 발견하는 <휴식 수집가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책 <휴식 찾기의 기쁨>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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