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꽤 자주 합니다. 스크린에서 벗어나,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진지하고 답답한 생각에서 벗어나,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고 떠들 시간을 마련해 준 보드게임이라는 놀이의 세계에서 느끼고 배운점이 많기 때문이에요. 놀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더 깊게 충전하고 회복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얼마나 진한 개운함과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 싶어요.

원고의 일부는 이전에 미리 써 둔 것이고, 일부는 제철휴식을 통해 마감하면서 구독자분들께 가장 먼저 원고를 배송하고자 합니다. 원고가 어느 정도 묶이면 책의 형태로 만들어 보고 싶은데요. 만약 이 글들이 엮여 책이 된다면 한 권의 ‘보드게임 영업멘트’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좋은 걸 나만 누릴 수는 없어’라는 덕후의 정신을 담아 찐하게 영업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글의 첫번째 독자가 되어주신 구독자 여러분이 저의 에디터 역할을 해주셨으면 해요. 연재 글을 읽으시면서 많은 응원과 지지, 의견을 보내주세요. (파워 당당하게 요구..) 흥미로웠던 점, 바라는 점, 읽고 싶은 점들을 피드백으로 남겨주신다면 무척 큰 힘이 될 거에요! 그럼 첫 번째 연재글을 시작합니다.

(*이번 호 제철휴식 텃밭과 장비소는 쉬어갑니다.)

나에게도 할루젠이 전부인 시절이 있었다. ‘할루젠’이란 보드게임 입문자라면 누구나 거쳐간다는 ‘할리갈리, 루미큐브, 젠가’의 줄임말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드게임을 거의 해보지 않았거나, 할루젠 정도의 게임을 해본 적이 전부였다.

보드게임을 적극적으로 영업하고 싶다는 마음은 바로 이 ‘할루젠’에서 시작되었다. 할루젠을 넘어 깊고도 아름다운 보드게임의 세계를 얼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이 간절한 마음 때문에, 나날이 나의 영업 멘트는 늘어갔다. 

“우리 집에 보드게임 100개랑 과 주사위 500개가 있는데요.”

하며 운을 띄운다.

웬 유치한 주사위 자랑이냐 싶을 수 있지만, 이 멘트에 걸려드는 친구들은 꼭 있다. 새로움과 자극을 추구하면서도,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한 친구들. (물론 꿈쩍않는 친구도 많다.) 친구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 나는 이 말을 함께 덧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집에 보드게임 하러 놀러오세요”

‘집에 놀라오라는 말’. 생각해보면 이건 어렸을 적 자주 했던 영업의 말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를 초대하는 일이 쉬웠다. ‘오늘 우리 집에서 레고 같이 할래’, ‘엄마가 집에서 떡볶이 먹어도 된대’라는 가벼운 초대장을 날리면 친구들은 고민 없이 집으로 놀러 오곤 했다. 집에서 함께 놀며 쌓아 온 친구들과의 추억은 소중한 놀이의 감각으로 새겨져있다.

종이를 잘라 ‘이건 돈이야’, 인형에게 의자를 오르게 하며 ‘지금은 계단이야’, 침대 위에서 ‘여기는 언덕이야’ 하면서 놀던 시절, 내가 생각한 세상을 방 한 구석 어디서든 구현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되기도 하고, 슈퍼마켓 주인이 되기도 하고, 무대에 오르는 가수가 되기도 했다. 아주 작은 공간만 있어도 가능했던 상상의 놀이들이었다. 

자라면서 초대의 감각, 상상의 감각, 놀이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졌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에 쉽게 매혹 되었고, 지금 여기를 어디로 가정하는 일 대신 그 장소로 직접 가버리고 마는 더 쉽고 직관적인 감각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누구를 집으로 초대하는 일,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상상하거나, 순수하게 무엇에 몰입해 웃고 떠드는 경험은 줄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살고 있는 봉환씨로부터 뜻밖의 초대장을 받았다. (봉환씨는 나의 배우자이자 현재는 보드게임 작가이다.)

봉환씨는 대학 시절 언젠가, 과방에 놓여있던 ‘시타델’이라는 보드게임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사회생활로 지쳐있을 무렵에 문득 예전에 재미있게 즐겼던 보드게임을 떠올렸고, 어느 날 ‘스트라테고’라는 게임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게임을 같이 하자’는 게 그가 내게 건낸 최초의 보드게임 초대장이었다. 

그 이후에도 게임을 그닥 즐기지 않는 나를 위해 테마와 난이도를 엄선해 다양한 보드게임들을 들이밀었는데, 그 때마다 어린 시절 경험으로 아로새겨진 놀이의 감각이 떠올랐다. 때로는 나만의 아기자기한 농장을 경영하기도 하고(아그리콜라), 때로는 프랑스 남부 마을의 지도를 만들며 땅따먹기를 하기도 했다.(카르카손) 엉뚱한 꿈의 이야기 조각을 맞추어 나가기도 하고(드림온), 이스탄불의 상인이 되어 루비를 모으기도 했다(이스탄불).

진짜 루비가 아닌데도, 그 작은 투명 플라스틱을 모으기 위해 전력을 다하기도 하고, 굴려진 주사위에 좌절하기도 하며, 상인이 되었다가 항해사가 되기도 하며 그 세계관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 그건 내가 상상한대로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던 어린 시절의 감각과 비슷했다. 지금 우리가 보드판 위에 올려두는 나무조각을 ‘씨앗’이라고 약속하면, 그것은 씨앗이 되었다. 그 작은 약속을 함께 행하는 단순한 세계안에서 나는 깨끗한 개운함을 느꼈다. 오직 하나의 세계에 몰입할 준비가 될 사람만의 느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한 특권이었다.

무엇보다 보드게임을 하는 동안은 나의 사회적 위치가 잊혀지곤 했다. 지금 하고 있던 일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편협한 잡념들은 미처 설 자리가 없었다. 책이나 영화를 볼 때와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구경하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내가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다음 스토리를 만들고, 결말을 책임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내 플레이에 따라 승자가 바뀌기도 하고, 게임의 전개가 매번 바뀌기도 했으니까. 온라인 게임에서 손에 쥐어주는 비주얼에 힘과는 또 다른 차원의 상상 속 세계에 대한 이야기. 나는 그 세계에 매료되었다.

이 즐거움과 개운함의 힘은 생각보다 컸다. ‘나 혼자만 알기 아까워’라는 인류애가 발동할 때 쯤, 코로나가 터졌다. 안전하게 놀 방법을 궁리하다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보드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먹을거리나 재미있는 콘텐츠를 가운데 두지 않고 친구들과 놀이에 집중한 경험이 얼마만이었을까. 

우리는 큰 테이블에 모여 앉아, 보드판 위에 펼쳐진 하나의 세계에 집중했다. 필승젼략을 세워 서로를 이기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함께 공유할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가까웠다. 친구를 초대하고 함께 이야기를 상상하며, 마음껏 노는 시간. 아이처럼 얼굴이 벌개져 온 마음으로 에너지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수년 간 보드게임을 즐기며 내가 발견한 사실 하나는, 어른들에게도 절실하게 놀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순수함을 꺼내 자유로운 상태에 머물 시간이 필요하다. 스크린 앞에서 입을 꾹 다문 채 고독하게 즐기는 게임 대신, 머리가 지끈해지는 일 얘기 대신, 훈수와 선 넘기가 반복되는 지루한 대화 대신,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작은 휴식이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놀이의 재미가 덕질로 이어진 봉환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보드게임 작가 겸 프리랜서 작가로 직업을 전향했다. 그는 이제 직접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룰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나 역시 보드게임을 매개로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보드게임으로 만들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도전들을 이어가고 있다.

보드게임은 우리 삶의 풍경을 전방위적으로 바꿨다. 때로 새로운 일을 하게 도와주며, 많은 시간 우리를 어린아이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작은 상자 하나 안에 담긴 세계가 우리를 이토록 흔들어놓다니. 그  변화에 비하면 아직 영업멘트를 시작도 못한 셈이다. 

이 글에서는 보드게임이라는 세계를 소개하고 싶다는 작은 열망을 넘어, 누구나 ‘보드게임’과 같은 마음 속 놀이 하나쯤은 품고 살아갔으면 하는 큰 염원을 담고자한다. 어른도 놀고 싶으니까. 어른도 친구와 깔깔대고 싶으니까. 어른도 더 자유롭고, 더 가벼워지고 싶으니까. 어른의 상상력도 어린이의 상상력 못지 않으니까. 삶에서 더 많이 웃고, 재미를 나누는 순수한 순간을 더 많이 만들고 싶으니까. 지금부터 어른들의 진짜 놀이, 보드게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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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라이프컬러링을 운영하며 <내가 좋아하는 휴식리스트 만들기>, <휴식 박사과정>을 운영하는 자칭, 타칭 휴식 덕후. 사람들이 각자의 휴식을 발견하는 모습이 좋아서, 나만의 휴식법을 발견하는 <휴식 수집가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책 <휴식 찾기의 기쁨>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