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꽤 자주 합니다. 스크린에서 벗어나,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진지하고 답답한 생각에서 벗어나,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고 떠들 시간을 마련해 준 보드게임이라는 놀이의 세계에서 느끼고 배운점이 많기 때문이에요. 놀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더 깊게 충전하고 회복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얼마나 진한 개운함과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지를 소개하고 싶어요.

원고의 일부는 이전에 미리 써 둔 것이고, 일부는 제철휴식을 통해 마감하면서 구독자분들께 가장 먼저 원고를 배송하고자 합니다. 원고가 어느 정도 묶이면 책의 형태로 만들어 보고 싶은데요. 만약 이 글들이 엮여 책이 된다면 한 권의 ‘보드게임 영업멘트’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좋은 걸 나만 누릴 수는 없어’라는 덕후의 정신을 담아 찐하게 영업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연재를 준비하며 다른 코너들은 잠정적으로 쉬어갑니다. 대신 이 연재가 여러분께 새로운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 독자가 되어주실 구독자분들의 응원과 의견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흥미로웠던 점, 바라는 점, 더 듣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보내주세요.

  

<스코틀랜드 야드>는 ‘Mr.X’라는 도둑이 되어 탐정의 포위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보드게임이다. 런던, 베를린, 뉴욕, 도쿄와 같이 실제 존재하는 도시가 배경이 된다. 내가 도둑 역할을 맡게 되면 택시, 버스, 지하철, 보트를 활용해 나만의 도주 경로를 계획해야 한다. 턴이 끝날 때까지 탐정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면 게임에서 승리한다.

<테라포밍 마스>는 화성을 개척하는 것이 목표인 보드게임이다. 인간이 살 수 있는 테라포밍 조건인 산소 14%, 기온 영상 8도, 전체 대지 면적의 9%를 해양으로 만드는 것이 게임의 목표다. 과학자이자 보드게임 작가인 야코브 프뤽셀리우스는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5년 이상을 들여 게임을 구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덕분에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 실제 화성을 개척하는 듯한 리얼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고고학자가 되어 유적을 탐사하는 게임도 있다. <아르낙의 잊혀진 유적>에서는 미지의 섬 ‘아르낙’을 탐험하며 고고학적 단서를 수집한다. 현장을 발굴하고, 암호를 해독하며, 섬 곳곳에 존재하는 수호신을 마주하기도 한다.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단순히 고고학자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이 되어 미션을 수행하는 듯한 몰입을 경험한다.

이런 게임들을 하다 보면, 평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자아가 되는 기분을 맛본다. 마포구 합정동에 사는 평범한 시민이었던 내가, 갑자기 도둑이 되어 도쿄 시내를 활보하고, 화성을 개척하는 기업가가 되고, 고고학자가 되어 미지의 섬을 탐험한다. 단순히 “도둑이 되어 도망 다니면 얼마나 쫄릴까?” 같은 가벼운 상상을 넘어, 게임 안에서 실제로 그 인물이 되어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된다. 나의 결정은 곧 게임의 결론을 바꾸고, 누구와 협력하고 배신하느냐에 따라 전개가 완전히 달라진다.

즉,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선택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온전히 그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는 묘사와 구현에서 오는 말초적 자극을 즐기지만, 게임에서는 다르다. 잠깐의 공상에 빠져 있으면 곧 실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훨씬 높은 집중이 필요하다. 주사위를 굴려 이동하고, 카드를 선택해 문제를 해결하며, 한정된 자원을 배분해 다음 단계를 계획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깨어 있다. 오감을 동원해 상황에 개입하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에 몰입하면서도 동시에 각성된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나는 이 상태를 ‘깨어 있는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이라 느꼈다.

스티브 테일러의 책 『조화로움』에서 이 상태를 잘 설명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강박적인 걱정꾸러기”인 시인이자 조종사 다이앤 애커먼은 비행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비행은 자신이 “완전히 깨어있되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데, 그 상태는 “일종의 황홀경”이다. (중략) 그런 활동은 수다스런 생각을 잠재워서 마음을 비워주고 당신에게 살아 있는 느낌을 되찾아준다. (중략) 까다로운 활동일수록 심지어 위험한 활동일수록 더 많은 집중을 요하고, 따라서 마음을 더 고요하게 해주며 당신 존재의 조화로움으로 이끌 가능성이 더 크다.

누군가는 달리기나 수영에서, 혹은 비행기 조종이나 춤추기에서 이러한 ‘깨어 있는 몰입’을 경험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요리, 산책, 뜨개질, 한 잔의 커피에서 이 상태로 진입한다. 결국 새로운 자리에 앉아 새로운 자아가 되어 깨어 있는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경험인 것이다. 선장이 된 내가 탐험할 경로를 구상하고, 농부가 된 내가 밭을 일궈가는 순간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도 소중하다.

나에게는 보드게임은 이런 경험의 집합소다. 1인 브랜드 대표, 딸, 창작자라는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고고학자, 마법사, 도둑, 화성 개척자가 되어보는 황홀경. 수다스런 생각이 잠재워지고, 심지어 마음이 고요해짐을 느끼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게임에 참여하는 모두가 새로운 자아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그 경험을 나눈다.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자주 조화로워진다. 일상의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자아를 경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보드게임이 선사하는 '깨어 있는 시간'이 아닐까. 현실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게임 테이블에서 일어설 때 우리는 새로운 리듬 하나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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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찾기의 기쁨> 유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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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라이프컬러링을 운영하며 <내가 좋아하는 휴식리스트 만들기>, <휴식 박사과정>을 운영하는 자칭, 타칭 휴식 덕후. 사람들이 각자의 휴식을 발견하는 모습이 좋아서, 나만의 휴식법을 발견하는 <휴식 수집가 보드게임>을 개발하고, 책 <휴식 찾기의 기쁨>을 썼습니다.